2009년 10월 12일
쉬이익!
가죽을 꼬아 만든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촤악!
그리고는 그대로 여인의 매끄러운 등 위에 붉은 상처를 만들었다.
주르륵!
상처에서 배어나온 핏물이 우윳빛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군요.”
삼십대 중반쯤? 베드신도 두어 번쯤 들어가는 멜로영화의 주인공이라면 딱 어울릴 잘생긴 사내가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 이런 게 세상을 바꿀 연구인가요, 이박사님?”
사내는 별다른 가구나 장식이 없는 썰렁한 방에 놓인 사무용 의자에 앉아있었다. 사내의 맞은편 벽은 전체가 유리로 되어있었는데, 그 유리벽 건너편에선 무슨 프로레슬러라도 되는 것처럼 보이는 덩치 커다란 남자가 웬 젊은 여자의 등을 향해 연신 채찍질을 해대고 있었다. 여자는 천정에 늘어진 쇠사슬에 매달려있었고, 채찍이 내리칠 때마다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방음이 잘 된 것인지 유리벽 건너편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확실히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지, 장중령.”
사내 - 장중령이 있는 방에는 그 외에도 오십대 중반쯤의 남자가 같이 있었다. 그 남자 - 이박사는 박사라는 호칭에 걸맞게 흰색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넉넉한 몸집에 무척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장중령이나 이박사나 유리벽 건너편의 상황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외모의 소유자들이었다.
“포르노, 그렇지 요즘엔 야설이니 야동이니 하고 부른다던가? 뭐, 그런 것에서라면 굉장히 매혹적인 장면일 수도 있어. 예쁜 여자를 향해 채찍을 휘두르고, 그 여자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쾌락에 신음한다.”
“물론 음탕한 상상 속에서라면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맞네, 장중령. 사실 포르노에 등장하는 것 같은 완벽한 사디스트나 마조히스트는 그리 흔한 게 아니거든. 따지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적인 면을 지니고 있지. 성행위 도중에 감각을 더 고조시키기 위해서 상대의 목을 조른다거나 가볍게 때린다거나 하는 정도는 스스로를 사디스트나 마조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있는 일이지. 뭐, 그런 취향이 특정한 계기를 통해 남들보다 훨씬 강하게 표출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 그러나 사디스트나 마조히스트를 자처하는 사람이라 해도, 저렇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심각한 수준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없어. 그런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극소수에 불과하지. 하지만 그건 일정한 정도 안에서야.”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고 제 주위에도 애인에게 주인님이라고 불러보라 한다든지, 섹스 중에 엉덩이나 등을 손바닥으로 아플 만큼 강하게 때린다든지 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큰 상처를 내고 피가 줄줄 흘러내리게까지 하면서 즐거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 남자나 여자가 전혀 없진 않겠지만, 그들은 이미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겠죠.”
“맞네, 장중령. 극소수 있긴 하겠지만, 어느 정도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에 빠져있는 경우라 해도 평생 흉터가 남을 정도의 상처까지 만들면서 즐거워하긴 힘들지. 담뱃불로 만든 작은 흉터도 아니고, 저렇게 등 전체를 반으로 갈라놓을 정도의 커다란 상처라면 더더욱 말이지.”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연구인 겁니까? 그리고 저 여자 문제는 없는 겁니까? 연구라고 하셨으니 무슨 인체실험 같은 거라는 건 알겠는데, 저렇게 큰 흉터가 남을 정도의 실험이라면…….”
“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동남아 쪽의 밀입국자거든. 그쪽 출신 치곤 대단한 미인이라 아깝긴 하지만, 이대로 말소된다 해도 누구 하나 알지 못할 걸세. 그 정도 조치는 이미 다 취해놓았지. 장중령 자네 설마 양심의 가책 같은 걸 느껴서 그러는 건가?”
“제7국의 요원으로 발탁되면서 그런 사치스런 감정은 지운지 오래입니다. 다만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박사님의 연구입니다. 세상을 바꿀만한 대단한 연구라는 게 설마 사디즘이나 마조히즘과 관계된 건 아니겠죠? 아무리 조치를 취했다고는 해도 위험한 인체실험까지, ……, 아니, 솔직히 저걸 실험이라고 부르는 게 우습군요. 저렇게 사람 몸에 채찍질을 해대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그렇다고 고문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고문이라면 저런 무식한 방법보다 훨씬 간단하면서도 효과가 좋은 게 얼마든지 있습니다.”
“물론 고문 따윈 아니네. 그리고 이 실험은 아주 큰 의미가 있지. 이제 부터 정말 재미있는 걸 보여주겠네.”
이박사가 유리벽 건너편의 덩치 큰 남자를 향해 뭔가 손짓을 했다. 남자는 채찍을 내려놓고는 한쪽 구석에 놓여있던 작은 상자를 들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굉장히 고통스러워 보이는군요.”
장중령이 여전히 불쾌한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채찍이 내려칠 때의 고통을 참으려 너무 꽉 깨문 때문인지 여자의 입술은 터져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고, 뭐라고 계속 말을 했다. 들리진 않았지만, 그게 살려달라거나 용서해달라는 식의 말일 거란 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임무를 위해 필요하다면 더한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장중령이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필요’란 게 있을 때에 한정된 일이다. 눈앞에 보이는 이 황당한 광경에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약물입니까?”
유리벽 안의 남자는 작은 상자 속에서 주사기를 하나 꺼내들었다.
“약물은 아니네.”
“네?”
남자가 여자의 팔에 주사를 놓는 것을 보면서 이박사가 말을 이어갔다.
“혹시 ‘나노테크놀로지’나 ‘나노머신’ 같은 말 들어본 일 있나?”
“나노라면……, 대충 들어본 일은 있습니다. 영화 같은 데서도 몇 번 본 일이 있고요.”
“그렇지, 아마 누구나 자네처럼 한두 번 정도는 들어본 말일거야.”
“그럼 혹시 저 주사가 그겁니까? 영화에서처럼 아주 작은 나노로봇들을 주입해서 저 상처를 치료한다거나…….”
“일부는 맞네. 저런 외과적인 상처는 물론이고 내과적인 부분에도 관여하지. 지금까지의 의술로는 고칠 수 없었던 각종 병에도 대응할 수 있고……, 심지어는 자연적인 노화까지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지. 아무튼 저 나노로봇이 상용화 되어 팔리기 시작하면, 인류의 평균수명이 최소한 30년 이상 늘어날 거야. 저걸 보게, 장중령.”
주사가 놓이고 채 1분여도 지나지 않았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채찍으로 완전히 헤집어진 여자의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었다. 마치 여러 날 동안의 자연변화를 필름을 빠르게 돌려 몇 초로 줄여놓은, 흔히 보는 그런 모습과 비슷했다. 하지만 자연변화 같은 건 멋있고 아름답지만, 상처가 아무는 모습은 무척이나 그로테스크했다.
“개복수술을 한 사람 50여 명에게 이미 실험을 했네. 나노로봇을 주입하고 평균 30분 정도면 상처가 완전히 아물고, 2시간 정도면 흉터도 완전히 사라지더군.”
“정말 대단하긴 하군요. 그런데 좀 문제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이라면 당당하게 정상적인 방법으로 실험을 해도 될 텐데…….”
확실히 굉장하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세상에 널린 게 환자와 부상자들이다. 왜 멀쩡한 여자를 채찍질 해가며 이런 실험을 한단 말인가?
“저 나노로봇이 방금 말한 것 같은 효과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
“네?”
“일단 보고 나서 얘기하지.”
유리벽 안의 남자가 다시 채찍을 들었다. 여자의 얼굴이 공포에 질렸다. 하지만 남자는 망설임 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이게?”
그리고 장중령의 표정이 확 변했다.
“자네가 본 그대로네.”
“저게 말이 됩니까? 고통에 몸부림치던 여자가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가 있죠?”
“저런 표정을 짓는 게 당연하지. 저 여잔 지금 태어난 이래 가장 강한 쾌감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뇌를 속이는 거지. 아프다, 뜨겁다……, 이런 것들을 느낀다는 건 결국 뇌가 그렇게 인식한다는 소리지.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거야 초등학생들도 아는 상식 아닙니까?”
“피부에서 느껴지는 각종 감각,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는 뇌에 직접 손을 쓰게 되면 어떻게든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피부에서 느껴진 감각이 뇌에 전달되는 그 과정에 개입해서, 정보를 살짝 바꾼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엄청난 고통이지만 뇌에서는 그걸 굉장한 쾌감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거지.”
“놀랍군요.”
“아직 놀라기는 이르네. 단순히 감각정보만 다루는 게 아니니까. 저 나노로봇은 인체 내의 모든 제어정보를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지. 예를 들어 어디론가 이동하기 위해 뇌에서 다리를 향해 걸으라는 명령을 내리면, 그걸 엉뚱하게 기어라나 점프하라는 명령으로 바꿀 수 있다네. 더불어 신체 내의 각종 호르몬 분비 등도 조절하지. 저 여자의 경우 채찍을 맞을 때마다 그것을 통증이 아닌 쾌감으로 느끼는 동시에, 뇌내마약인 엔도르핀을 엄청나게 분비하고 있지. 더불어 저게 의학적인 목적으로 쓰인다는 건, 반대로 말해서 몸의 일부를 망가뜨리거나 혹은 완전히 살해하거나 하는 데도 충분히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고.”
이박사의 설명에 장중령의 표정이 황당하게 변했다. 이건 단순히 의학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저 나노로봇을 다루는 사람이 세상도 지배할 수 있겠군요.”
장중령의 말에 이박사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잘만 이용한다면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 하지만 현재 저 나노로봇은 완전하지가 않아.”
“불완전하다고요?”
“세 가지 문제가 있네. 우선 저 나노로봇의 효과가 한시적이란 거야. 소변이나 땀 등을 통해 빠져나오는 양이 엄청나거든. 그 때문에 주입하고 보름 정도면 나노로봇의 수가 부족해서 본래 의도한 효과를 보이지 못하지. 그리고 다시 보름 정도 더 지나면, 그러니까 총 한 달이면 몸 안에 나노로봇은 하나도 남지 않네.”
이박사가 물로 입술을 축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일단 주입한 다음엔 더 이상 새로운 명령을 입력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이네. 예를 들어, 저 여자에게 주입한 나노로봇에는 기본적인 치료기능 외에는 두 가지 명령만 입력되어있네. 하나는 일정 수준 이상의 통증은 고통이 아닌 쾌감으로 바꾸라는 것이고, 둘은 그 일정 수준 이상의 통증이 있을 때마다 막대한 양의 엔도르핀을 분비하라는 것이네. 그런데 일단 주입하고 나면 명령을 추가하거나 수정하는 게 불가능해. 그러니까 마치 인형을 조종하듯 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얘기야.”
“그렇군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젠데, 나노로봇은 얼마든지 더 만들 수 있지만 거기에 원하는 명령을 마음대로 주입하는 게 불가능해졌네.”
“네?”
“본래 이 나노로봇 개발의 책임자는 내가 아니라 최한 박사일세. 자네야 모르는 사람이겠지만, 어쨌든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었네. 팀원들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개발 자체를 사실상 그 사람 혼자 해낸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문제는 그가 이 나노로봇이 의료용 이상 다른 목적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네. 솔직히 모순이지. 자기가 다 만들어놓고, 그 기술이 두려워지다니…….”
이박사가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깊게 빨아들인 연기를 길게 뿜어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는 의료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정도까지의 자료만 남겨놓고 나머지를 모두 파기했네. 지금 남아있는 걸로는 저 여자에게 주입한 나노로봇을 만드는 게 한계야.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음을 아는데 아쉬울 수밖에 없지.”
“그렇겠죠.”
“그런 와중에 최박사가 사고로 죽어버렸어. 더구나 최박사를 제외하면 이 기술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강은영 박사도 실종 상태지. 개발을 맡은 팀원 중 다른 이들은 사실상 두 사람의 잔심부름 정도나 하던 수준이고, 남은 자료도 아무 것도 없고…….”
“그게 절 부른 목적이시군요?”
“맞네. 최박사의 사고조차 어쩌면 실종된 강은영 박사의 짓일지도 몰라. 그 여자도 나하고 비슷한 성격이거든. 그러니까 최박사처럼 훌륭한 성품을 가진 순수한 학자가 아니라, 뭔가 추악한 짓을 충분히 시도할만한 욕심 많은 인간이란 거지. 아니면 어떤 좋지 않은 목적을 가진 자들이 강박사를 손에 쥐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무튼 본래 목적과는 너무 다른 결과가 나와서 두려워졌고, 그래서 자료 대부분을 파기했다는 것까지는 좋아. 솔직히 그걸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하며 추악한 욕심을 부리는 나 같은 인간 보다는, 어찌되었든 최박사 같은 사람이야말로 존경받아 마땅하겠지. 그런데 하필 자료를 파기한 바로 그 다음날 그 기술을 제대로 알고 있는 두 사람 중 하나가 사고로 죽고, 다른 하나는 실종되었다면 아무래도 의심스럽지 않겠는가?”
“그렇겠죠. 그럼 그 여자를 찾아오면 되는 겁니까?”
“이 서류를 받게. 강은영 박사에 대한 자료들이야.”
내민 서류를 받아드는 정중령을 향해 이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걸세. 아까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했지?”
“네, 박사님.”
“하지만 강은영 박사는 세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한 나노로봇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커. 일단 저 여자에게 주입한 것과는 다른 명령을 얼마든지 새로 입력할 수 있는 능력이 그녀에겐 있지. 그리고 주입 이후 자연배출 되는 양만큼 나노로봇 스스로가 인체 내의 혈액이며 지방 등을 이용해 자기복제를 계속하도록 하는 기술이 완성된 것으로 아네. 무엇보다 주입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새로운 명령을 내리는 방법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네.”
“그렇다면?”
“맞아. 그녀는 원할 경우 나노로봇을 이용해 어떤 사람이건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셈이지.”
“위험한 임무군요.”
“의외로 피해가 많이 생길 수도 있네.”
“맡겨주십시오. 저희 제7국은 대한민국 최고의 요원들만 모여 있습니다.”
# by bijuryu | 2009/10/12 14:12 | 제어 | 트랙백 | 덧글(0)